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문단 편집) == 생애 == [[파일:YpBDi.jpg]] 출생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1890년 8월 20일 오전 9시경에 태어났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 지방 출신이며, 부친은 귀금속 방문판매사원이었던 윈필드 러브크래프트, 모친은 세라 수전 러브크래프트이며 형제 없이 외아들이었다. 특이한 점은, 부모의 결혼 시기가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편에 속하는 30대였다는 점이며, 양쪽 모두 [[초혼]]이었다. 1893년, [[부친]]인 윈필드는 원인불명의 갑작스러운 [[발광]] 증세를 보여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5년 뒤 그곳에서 숨졌다. 이후 부친의 투병은 [[매독]]으로 인한 정신이상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남편을 잃은 세라는 친정아버지인 위플 밴뷰런 필립스에게 의탁하였고, 러브크래프트 또한 아버지 대신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외숙모에게 길러졌다. 이 시절은 러브크래프트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외조부인 위플 밴뷰런 필립스는 자신의 문학적 취미에 따라 [[아라비안 나이트]], [[일리아스]], [[오디세우스]] 등의 고전 명작을 러브크래프트에게 읽도록 하였고, [[영국]]의 오랜 [[괴담]]이나 이야기, 소설 따위를 들려주곤 했다. 그로 인해 러브크래프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아랍]], 고대 문화, 공포 소설 등으로 치중되었는데, 세라는 아들의 이러한 경향을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를 제외하면 러브크래프트가 원하는 것은 되도록이면 다 들어주어서 당시로선 비싼 물건이었던 [[현미경]]을 사주기도 했다. 어려서는 [[셜록 홈즈]]에 빠져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탐정단 놀이를 하며 놀기도 했다며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회고하고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몸이 병약하여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하고 쉬게 되었지만,[* 신경발작을 일으킨 신체적인 문제도 있었고 러브크래프트 본인이 수학에 매우 취약했던 문제도 있었다.] 외조부는 [[앵글로색슨]] 혈통을 이어받은 유서 깊은 가문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통학을 강요하지 않고 [[독서]]와 [[가정교사]]를 통하여 학습하도록 했다. 사실 당시에는 [[홈스쿨링]]이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가 학교에 복학한 직후, 외조부가 벌여 놓은 사업을 수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사건이 발생하여 고등학교는 졸업하지 못했다.[* 2016년에 출판된 평전 In the Mountains of Madness에선 러브크래프트가 아는 것은 많지만 수학이 약하고 학업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해 점수가 안 좋았다고 한다.] 이 때 러브크래프트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외조부의 죽음과 더 이상 풍족한 생활을 누리지 못한다는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히스테리]]를 일으켜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원래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이었던 모친 세라도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끝에 [[우울증]]과 히스테리를 일으켜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정신병원이 바로 그의 남편이 죽은 병원이었다고 한다. 러브크래프트와 모친의 관계는 매우 양호하여 그녀가 숨을 거둘 때까지 지속적으로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끝내 모친이 사망하자 러브크래프트는 크게 좌절했다고 한다. 이후 러브크래프트는 [[히키코모리|5년여간 은둔자처럼 세상과의 교류를 끊고 독서를 하며 살았는데,]] 그런 그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발생한다. 어린 나이부터 취미 삼아 집필을 계속해 왔던 러브크래프트는 어느 날 한 동인 잡지에서 읽은 글이 불만족스러워서 [[키배|그 글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고 그 글을 쓴 작가의 추종자들과 잡지의 기고란을 통해 다툼을 벌였다]]. 이것이 편집자의 눈에 들어왔고 러브크래프트에게 원고를 청탁한 것. 후에 러브크래프트는 이 사건으로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소설가로 데뷔하게 된 러브크래프트는 작가 모임에서 한 여성을 만나는데, 그가 바로 후에 아내가 되는 소니아 하프트 그린(1883~1972)이었다.[* 로버트 E 하워드의 소설 캐릭터인 [[레드 소냐]]의 이름이 이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러브크래프트보다 일곱 살 많은 소니아는 모자를 파는 상점을 운영하면서 유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러브크래프트와 소니아는 [[1924년]]에 결혼했고 러브크래프트는 아내가 살고 있는 [[뉴욕]]으로 이주한다. 하지만 둘은 곧 별거하기 시작했고, 결국 몇 년 뒤에 [[이혼]] 신청을 하고 만다. 사실 소니아는 러브크래프트와 이혼하고 나서 다시 다른 남자와 재혼했지만 둘은 러브크래프트 사망까지 공식적으로는 혼인관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러브크래프트가 문서상의 이혼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별거 이후 러브크래프트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서 이모 집에 얹혀 살기도 하고, 구직이 좀처럼 되지 않자, 절망하는 등 안쓰러운 생활이 이어졌다. 동시에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져서 1926년에는 사회주의 모임에 참석을 하기도 했고 [[대공황]] 시기가 되자 [[뉴딜 정책]]을 지지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부터 타 인종에 대한 혐오가 본격적으로 심해졌는데 젊었을 적 인종주의 언급은 그 시기의 중상류층 [[WASP(미국)|WASP]]가 가지고 있는 단순 우월주의 사상에 불과했다면 이 시기 인종주의는 본격적으로 다른 인종을 노골적으로 폄훼하고 사회적인 문제로 언급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이 탓인지 잠시 인종문제에 대해서는 [[아돌프 히틀러]]를 지지했다가 철회하기도 하였다. 이혼 신청까지 간 원인에 대해서 명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의외로 인종차별은 아니고-- 대도시 생활에 대한 러브크래프트의 부적응과 연상의 아내에게 끌려다니는 느낌에 대한 러브크래프트의 불만이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러브크래프트는 결혼하여 독립하기 전만 하더라도 귀족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숙모들과 같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여성에 대한 불만은 자신의 소설 [[현관 앞에 있는 것]]에서도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이혼 신청 후에도 소니아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러브크래프트가 무려 30페이지나 되는 편지를 소니아에게 보냈었다고 한다.''' 소니아 그린은 러브크래프트를 '''충분히 훌륭한 남자'''(Adequately Excellent)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으로 평가하였는데, 이에 대해 러브크래프트라는 남자에 대한 비호감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의견과 러브크래프트가 남자로서 부족했기에 헤어졌다는 의견이 공존한다. 특히, 러브크래프트 본인의 경제적인 능력이 상당히 파멸적이었던지라 결혼 후 아내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직장을 구한다고 나섰지만 러브크래프트는 세상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보니 구직에 어려움이 많았다. 어렵게 직장을 구했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성격 문제 때문에 직장생활에 적응을 못하여 얼마 못가고 그만두었다. 다른 직장도 몇 번이나 구했지만 이것도 적응을 못하여 나중에는 그만두었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흥미가 있는 잡지사의 사장이 그에게 편집인 일자리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러브크래프트는 이것조차 일해야 하는 곳이 [[시카고]]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소니아 그린이 훗날 회상하며 러브크래프트는 소니아의 존재에 매우 깊히 감사한다고 한 적은 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단 한 번도 안 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 때문에 러브크래프트가 아내를 진정 사랑했는지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다. 결혼은 단순히 '정상적인 남자라면 결혼을 해야지.' 하는 생각에 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다. 실제로 러브크래프트는 소니아에게 "당신은 러브크래프트 부인이니 그에 걸맞게 행동하시오."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소니아와 헤어진 뒤 고향 [[프로비던스]]의 집에 돌아온 러브크래프트는 칩거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쓰여진 작품들이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얼마 팔리지 않았고, 생활은 곤궁해져만 갔다. 결국 [[1936년]]부터 러브크래프트는 [[암|장암]]에 걸렸으며 암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다가 이듬해인 1937년 3월 15일에 사망했다. 친구인 발로가 러브크래프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없냐고 [[전보]]를 보냈지만 그날 밤 '''하워드가 오늘 아침에 죽었습니다. (연락해줘서) 고마워요'''라는 러브크래프트의 이모의 전보를 받았다고 한다. 사후에는 일가의 가족묘에 묻혀 양친과 같은 묘비에 이름이 새겨졌으나 [[장르문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의 묘로는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한 그의 팬들이 나중에 기금을 모아서 그를 위한 새로운 묘비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러브크래프트의 이름과 약력, 그리고 생전에 그가 보낸 편지에 있던 문구 중 하나인 '''"내가 곧 프로비던스다. (I am Providence)."'''[* 프로비던스는 [[프로비던스(도시)|도시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는 '신의 섭리', 혹은 '신'이라는 의미이다. 단, 팬들이 세운 묘비다보니 '왜 하필 저 문장을 골랐냐'라는 논란도 살짝 있었던 모양이다. 관련 질답은 [[https://www.quora.com/What-is-the-meaning-of-I-am-Providence-at-the-gravestone-of-H-P-Lovecraft|여기]]를 참고.]라는 말을 새겼다. 참고로 러브크래프트는 엄청난 [[편지]] 덕후였는데 러브크래프트와 친하게 지냈던 작가들은 [[펜팔|모두 그와 편지로 서신을 교환해서 친구가 된 것이지]] 그를 실제로 만난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다만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러브크래프트 본인이 그들이 사는 곳으로 여행을 간 적은 여러번 있었다.] 한번은 동료 여작가가 문학에 대해서 러브크래프트와 직접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가 사는 집 앞까지 갔다가 러브크래프트가 '''단지 사람이 없고 조용하다는 이유로 늦은 밤의 무덤가를 대화 장소로 고집해서''' 동료 작가가 식겁하여 돌아간 일화도 있었을 정도다. 위에 언급된 로버트 E. 하워드 또한 러브크래프트와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 받았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도 마찬가지라서 1950년대에 기자가 와서 러브크래프트에 대하여 질문하자 "러브크래프트와 만난 적이 있어야 그가 어땠는지 말이라도 해줄거 아냐, 나는 그저 그에게 기껏 편지 몇 장만 받았을 뿐이라구!"라고 말했다. [[스티븐 킹]]이 말하기를 '''러브크래프트는 요즘 사람 같았으면 [[인터넷]]이나 [[SNS]] 같은 데서 가장 왕성하고 활발하게 놀았을 거'''라고... --사실 인터넷도 안 되는 시절에 5년 동안 집에서만 산 것도 대단하긴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